임 열 (任 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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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4世 죽애공 임 열 (任 說)
자는 군우(君遇) 호를 죽애(竹崖) 또는 죽계(竹谿)라 하였다. 남부참봉(南部參奉) 증좌찬성(贈左贊成) 명필(明弼)의 둘째아들이요, 목사(牧使) 윤(尹)의 아우다.
1531(중종26)년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두가지 시험에 모두 합격하고, 1533년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처음에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선임되고 곧 사관(史官) 으로 추천되어 들어갔다.
1536(중종31)년에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제2위로 합격하였고, 2년 후 1538년에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발영시(拔英試)에 역시 제2위로 급제하니 반기(半紀6년)동안에 우수한 성적으로 세 번이나 과거에 급제한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며 그 문망(文望)이 일세에 높아 호당(湖當)에서 의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선발되었다.
그 뒤에 부교리(副校理). 집의(執義). 전한(典翰)등 삼사(三司)의 관직을 역임하고, 직제학(直提學) 으로 승지(承旨)에 발탁되었으며 명종(明宗) 때 대사간(大司諫). 이조(吏曹).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가선게(嘉善階)에 승진,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대사헌(大司憲). 예조참판(禮曺參判)을 역임하고, 다시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나가 막혔던 것을 소통해 일으키고 산만하게 흩어졌던 것을 거두어 안집(安集)시켜 성망(聲望)과시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한성부(漢城府)의 좌. 우윤(左右尹)을 역임하며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도총부 부총관(都總府副總管)을 겸임하였다.
판윤(判尹)으로 승진.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는데 혹은 자리를 옮기기도 하고, 그대로 눌러있는 등 한성부를 떠나지 않은 것이 무려 30여년이었다.
기영회(耆英會)에 참여하였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말직으로 82세에 졸하였다.
공이 뛰어난 문장으로 수많은 극선(極選)의 관직을 역임하였으나 능히 근면과 성실로 그 직책을 다하여 부임하는 곳마다 성망(聲望)이 있었다.
조정에 벼슬한지 60년에 시종이 한결 같았다. 중간에 간신(奸臣)들의 사화(士禍)를 격기도 하였으나 일찍이 몸을 굽혀 그들을 따른 적이 없었고, 또한 환란(患亂)을 범한바 없어 일세의 공론이 공을 크게 중히 여기고 의탁하는 자도 많았다.
명. 선(明宣)사이에 사론(士論)이 급변하여 악한 자를 제거하고 착한 자를 등용하자고 주장하자 원로와 선배들이 그들의 탄핵을 두려워하여 신진(新進)들과 동조하여 풍습이 갑자기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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