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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수정(任守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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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임씨 16世 교리공(校理公) 임수정(任守正

1542(중종37)년생

 

자는 약초(約初) 이조판서(吏曹判書) 국로(國老)의 셋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비상(非常)한 뜻이 있었고 의젓하기가 어른 같았으며, 희롱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성하면서 스승의 독려 없이 학업이 나로 성취하였으며, 관대하고 후중하며 큰 도량이 있어 기쁨과 노여움을 안색과 언사에 나타내지 않음은 물론이요, 남의과실을 말하지 않았고 남을 대할 때는 항상 겸손하게 하니 부모가 유달리 사랑했다.

1588(선조21)19세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두 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나가 종유(從遊)하니 명성이 자자(藉藉)하였는데 지론(持論)이 엄정하고 행동이 법도에 있어 제류(儕類)들이 어려워하고 꺼려했으며 모두 큰 그릇으로 기대하였다. 글씨를 지으면 몸씨 명백하고 조리가 있는데도 여러 해를 전시(殿試)에 실패하다가1597(선조30)년 봄 문과 별시(別試)에 울과(乙科)제 이명(第 二名)으로 급제하니 사람들이 인재를 얻었다고 서로 치하하였다. 추천받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이 되어 논술(論述)이 매우 공평하매 동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대교(待敎)를 거쳐 관례에 의해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으로 옮기고 다시 사강 원 사서(司書)에 임명되니 세자(世子)에게 강독(講讀)을 권면함이 법도가 있었다.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으로 옮기니 규찰(糾察) 탄핵(彈劾)함에 있어 사정에 끌리지 않았고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가 수찬(修撰)이 되어서는 소장(疏章)을 올려 자주 경연(經筵)에 임어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가상하게 받아들였다.

1600(선조33)년에 양사(兩司)가 논쟁을 벌이다가 그 처치(處置)를 짓게 되었는데 동료들의 논의가 매우 편벽 되였다. 공이 분연히 말하기를 간원(諫院)에서 김(). ()을 공격한 것도 잘못이지만 헌부(憲府)가 다른 중신 (重臣)을 끌어다가 보복하려하니 옳지 않은 것은 일반이다. 하고 양사(兩司)의 관원을 모두 체직(遞職)케 할 것을 청하려 하자. 동료들이 불가하다고 고집하여 공이 서명(署名)하지 않고 나와 버렸다. 그리고 바로 이조(吏曹)에 임명 되였으나 논의를 달리하는 자의 비방으로 나가지 못 하였다. 그러나 조금도 노여워하는 빛이 없었다.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 되였으나 나가지 않았고 이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으나 당시 논쟁하던 일로해서 파직 되였다. 그리고는 광능(廣陵)으로 가서 어버이를 모시고 조석으로 기뻐하였고 더욱 송()나라 정주(程朱)의 글을 힘써 읽었고 세상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1604년에 아버지 상사를 당하여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해 10월 광주(廣州) 신능리(新陵里) 선영(先塋) 동쪽 卯坐) 에 장사 하였는데 1975년 월에 다시 충청도 천원군 입장면 시장리(天原郡 笠場面 侍壯里) 2번지 신좌(辛坐)로 선영과 함께 이장 하였다.

()은 우봉 김씨(牛峯金氏), 병사(兵使) 우서(禹瑞)의 딸이며, 효부사재속삼강록(孝婦事載續三綱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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