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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유(任天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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豊川任氏 5世 풍해군(豊海君) 임천유(任天裕) 


官 古韓章惑稱三韓秉忠義同德贊化功臣豊海君室 鷄林郡夫人 李氏籍慶州云 陶谷辛坐原有一古墓故老傳爲豊海君 葬山 英宗癸丑年間得片石於墓 傍百餘步只有任公二字 今上丙午又斷碑於原左近地瓦三行十五字稱顯父考顯母妣文體興今代異不敗贊以爲某公墓 卽其他祭壇崴以九月十三日合祭兩代壇上竪碑記前後事實碑文後孫希曾撰

 

고려(高麗)에서 병충분의동덕찬화공신(秉忠奮義同德贊化功臣)으로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門下侍中)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판병부사(判兵副事) 겸 팔위 상호군(八衛上護軍)을 지내고 경연사(經筵事)로 풍해군(豊海君)에 봉해졌다.



 옛적부터 내려오는 족보에는 공은 삼한동덕찬화공신(三韓同德贊化功臣)으로 풍해군(豊海君)의 봉작을 받았다고만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약 300년 전인 이조 영조 때에 공의 묘지(墓誌)의 깨어진 조각이 나타나서 공의 무덤의 소재가 알려졌다. 곧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도곡동 은 옛적에는 풍천부(豊天府)에 속한 땅인데 이곳이 박달산(朴達山)이란 큰 산이 있고 산 밑에 옛적부터 내려오는 무덤이 있어 지방 사람들이 이것을 곧 풍해군의 무덤이라고 구비로 전해내려 왔었다. 그러다가 1733(영조9)에 이 무덤 아래 50미터쯤 되는 곳에서 깨어진 돌조각이 발견 되였는데 여기에는 임()이라는 글자 한 자만 있었으므로 이것만 가지고서 공의 무덤이라고 단정을 내릴 수가 없어서 그대로 있다가 1786(정조10)년에 곧 54년 뒤에 이 지방에서는 임봉겸(任鳳謙)이라는 분이 나무를 캐다가 무덤 왼편에서 비석파편을 발견했다. 크기가 말()만한데 왼쪽에는 깨져나가고 글자가 있는듯하나 많이 마멸되어 알아볼 수가 없고 첫줄에는 [아버지는 임도任徒)라고 하고 다음 줄에는 어머니 안씨(顯母妣安氏) 라고 하였고, 다음 줄에는 아들 봉직랑(孝子奉直郞) 이라 하여 모두 315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무덤이 풍해군의 무덤으로 확정을 지었고 그의 아버지인 검교대장군(()와 함께 여기서 해마다 제사를 드리기로 결정하게 되었으며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손인 대사헌(大司憲) 희증(希曾)

이 글을 지어 무덤 앞에 비를 세웠다. (1786(정조 10)년 이로 인하여 어사공 주() 이상은 모두 중국 사람이었다는 종래의 족보에서 기록된 것은 그 가치가 희박하게 되었다. 그러나 발견하였다는 그 비석 자체도 의문점이 없지 않으므로 앞으로 정확한 자료가 더 발견되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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